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래퍼드 리맬러리 (문단 편집) == 제 12비행단 사령관 ==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그의 12비행단은 지정학적 위치상 [[독일 공군(나치 독일)|독일 공군]]과 맨먼저 맞닥뜨리는 제11 그룹[* 그래서 RAF에서 가장 많은 전투기가 배치되었다. 12 그룹에 15개의 비행대대가 배속된것에 비해서 11비행단은 28개의 비행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의 비행장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공명심에 불타는 리맬러리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휘하 비행대를 풀어서 독자적으로 독일 공군기들을 요격하도록 했다. 문제는 독일 공군이 영국 공군의 3배[* 영국 공군의 전투기는 657여 대. 독일 공군은 전투기만 따져도 2,000여 대에 달했다. 그리고 폭격기와 슈투카 편대까지 포함하면 쌍방의 전력차는 1:5에 달한다.]에 달해서 번번이 돌파당했던 것. 결국 11비행단은 독일 공군과의 공중전을 치르는 동시에 기지가 공격받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파크는 이러한 리맬러리의 행동에 크게 격노했지만, 리맬러리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러한 리맬러리의 트롤링은 영국 공군이 1940년 8월 중순~9월 초까지 격전을 치르는 동안 피해를 키운 원인이 되었다.[* 이 기간동안 영국 공군의 손실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존의 통설(1950~60년대)은 영국 공군이 전멸 직전에 몰렸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통설은 2000년대에 들어서 반박되는 상황이다. 손실이 크기는 했지만 영국측의 손실은 대부분 보충할 수 있어서 실질적인 전력 감소가 크지 않았으며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독일측 손실도 결코 가벼운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 문제는 리맬러리가 파크의 요구만 무시한 게 아니라 파크의 비행장을 보호하라는 다우딩의 지시도 무시하는 트롤링을 저질렀다는 것. 그러다가 결국 리맬러리도 마지못해서 11비행단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많은 적기를 잡고자 대편대 전술을 채택했고 이는 대형을 형성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11비행단을 공습하는 독일기를 제때 요격할 수 없었고 이렇다할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파크와 다우딩은 대편대 전술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리맬러리는 이런것을 전부 무시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은근히 [[런던]]에 독일의 공격이 집중되길 바랬는데, 이유가 순전히 런던이 12비행단의 작전구역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이쯤되면 [[막장]] 소리를 듣기에 손색이 없어보인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런던 대폭격은 독일 공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결정이 되었으니 이걸 예견했다면 전황을 예견하는 능력 자체는 준수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나마 영국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이사람이 야심가이지만 능력도 겸비한 인재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대편대 전술은 처음에는 [[뒷북]]이나 열심히 치고 있었지만 런던 대폭격이 시작되자 그 효과를 발휘했다. 마음놓고 런던으로 날아오던 독일 공군기들은 11비행단의 고춧가루 공세를 견뎌야 했고, 그렇게 도착한 그들을 50~60대에 달하는 12비행단의 전투기들이 개떼처럼 모여서 반기는 충격적인 상황이었기 때문. 다만 이후 파크와 다우딩이 거부했던 전술을 이용하여 해협을 건너가서 싸움을 걸었을 때는 신통치 못한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가장 위급한 때에 공적만을 생각한 그의 행동이 영국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를 입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1940년 12월에는 11그룹의 지휘관이었던 파크를 밀어내고 11그룹의 지휘관이 되었다.[* 파크는 훈련 비행 부대로 좌천되었다. 나중에 파크가 이사람의 자리를 대신 임명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